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째 네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비켜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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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으로 한층 부풀었던 자유와 사랑과 양심에의 희망이
5·16 군사 쿠데타로 일순간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시인 김수영은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자조함으로써 불합리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는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확인한 그는
모래·풀·바람보다도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비판, 반성하게 된다.
시인은 시를 통해 아무 죄 없는 소설가를 구속하거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권력에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폭로하는, 진지한 자기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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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우리들은 무엇에 화를 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예전의 지식인이 소설가나 기자라고 한다면.

요즘의 지식인은 세상 모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 아니다.

비겁하다. 치사하다.
뭔가 약점꺼리 하나 잡았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에게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도
그걸 방관하며 쳐다보고 있는 나도.

비겁하다.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비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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